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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육성 회고록 〈22〉
‘제2의 6·25’라고도 했다. 대한민국에 먹구름을 몰고 온 외환위기 얘기다. 1997년 12월 18일 대통령에 당선된 나, 김대중(DJ)은 당선자로서 첫날부터 생존의 갈림길에 선 한국 경제에 매달렸다.
구제금융을 받고 경제 주권을 바친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체제가 본격화한 시기였다. 당장 내일 무슨 일이 터질지 조마조마했다.
당선 이틀째인 20일에 임창열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을 불렀다. 나라 곳간 상태가 궁금했다.
“현재 외환보유액이 30억7000만 달러에 불과합니다. 당장 내년 1월 만기의 외채가 돌아오면 갚기 어렵습니다.”
곳간이 텅 비어 있다는 충격적인 고백이었다. 나라 경제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뭘 했는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대한민국이 파산의 벼랑으로 치닫고 있음을 절감했다.
외환위기는 성장지상주의에 매달려 온 ‘박정희식 발전 모델’에 종말을 고하는 사건이라고 본다. 당시 기업들은 경쟁력과 수익성을 외면한 채 문어발식 외형적 성장에 빠져 있었다.
권력과 결탁해 금융기관의 특혜 대출을 받아 덩치만 키웠다. 대마불사(大馬不死)의 배짱으로 배수진까지 쳤다.
방만한 경영 속에 위기가 닥치자 부실해진 기업과 금융기관은 충격을 견디지 못했다. 정부의 오판과 대응 실패로 국가 부도의 수렁으로 몰렸다. 이것이 외환위기 사태의 본질이다.
박정희 개발독재 vs 대중경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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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원문 :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99787?cloc=dailymotion